내가 모르는 그 번호는 아니나 다를까 널서리 팜 nursery farm 할아버지였다.
-안녕, 나는 할아버지야
"오 안녕, 무슨일이야(평화로운 척)"
-우리가 일할 사람을 하나 찾고 있는데, 그래서 전화했어
"아 그래? (내적 흥분 고조)"
-응. 너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는거야?
"아니. 아직 쉬고 있어.(심장 터지기 직전)"
-그래? 그럼 너 우리 농장에서 일할래?
"그럼. 좋지~(심장 터져버렷...)"
그렇게 각고의 자연스러운 노력(?) 끝에 나는 널서리 팜 nursery farm 에 취업하게 되었고, 다음 날 아침 새벽 시간에 맞춰 숙소 앞에 나가 기다렸다. 얼마나 기뻤는지. 때 널서리 할아버지가 태우러 온 셔틀 봉고에 내가 같이 타자 놀라하던 대만인 친구 표정이 눈에 아직도 선하다. 그 친구는 잠깐 놀라는 표정을 짓고, 활짝 웃으며 축하한다 말해주었다.
도착한 널서리 팜 nursery farm 의 모습은 아~주 커다란 비닐하우스 같은 느낌의 장소였는데, 천장이 아주 높아서 큰 공장 정도의 크기는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 무수히 펼쳐진 새끼 샌달우드 sandal wood 들... 손바닥만한 사이즈부터 팔뚝길이만한 사이즈까지 아기 샌달우드들은 이 곳에 다 모여있는 것 같았다. 널서리 팜 nursery farm 을 한국어로 하면 양묘장이라고 한다. 여기서 이렇게 아기 샌달우드들을 잘 키워내서 바깥에 다른 농장으로 내보내는 듯 했다.
이 곳에서 일하는 인력 구성원을 보니 여자는 열 너댓명 정도에 남자가 나를 포함하여 딱 4명이었다. 원래 3명이었는데 이제 우기가 끝나가니 일손이 필요해 나를 고용한 것이었다. 호탕한 상남자 스타일의 영국인, 다정다감하고 상냥한 스타일의 호주인, 그리고 다른 한 명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가졌던, La Réunion 라는 나라에서 온 친구였다. 생소한 나라일텐데 나도 처음 들어서 거듭 물어봤었다. 프랑스어로 대충 '레위니옹'이라고 발음하고, 영어로는 '리유니언'이라고 발음한다. 이 친구 이름이 Brice 였는데 일할 때 제일 친하게 지냈다.
그렇게 처음 일하기 시작한 날, 나는 약간 긴장했는데, 그 동안 일했던 곳들이 나에겐 항상 하드 난이도였기 때문. 농장 할아버지의 간단한 안내를 듣고나서 바로 투입되어서 시키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농장 내부의 구조가 약간 특이했는데, 농장 내에 허리 정도되는 높이로 레일들이 병렬로 세팅되어 있고, 그 레일 위를 타고 움직일 수 있게 철로 만들어진 구멍난 메쉬 판 같은 것들이 쭉 놓여져있었다. 그리고 아기 샌달우드들이 그 위에 놓여져 있는 구조.
남자들이 하는 일은 농장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퍼즐을 풀듯 이 레일 판들을 밀고 당기면서 위치 이동을 하거나, 그 위네 놓여진 작은 화분들을 들어서 다른 위치로 나르는 것 등이었다. 그래서 내가 한 일들이 대충 이런 것들이었는데, 하루를 마치고난 소감은...
이 것만...하면 된다고...?
레일 판들을 미는건 큰 힘이 필요 없었고, 그 위에 놓인 화분들도 전부 조그마했기 때문에 화분들이 가득 놓여진 레일도 그냥 쉽게 밀어낼 수 있었다. 또 일하는 시간이 내내 비닐하우스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뜨거운 사막의 태양을 온 몸으로 받아낼 필요도 없었다. 화분을 들어 나르는 것? 다들 새끼 샌달우드들인데 무슨 힘이 필요할까.
내가 찾아헤매던 직장이 여기 있었다.
그 동안의 고생과 근심걱정들과 내 노력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분명 내가 상상하던 대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으리라 추측했던 것이 맞았던 것이었다. 솔직히 하루가 지나고 또 갑자기 이상하고 힘든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었지만 괜한 기우였다.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하는 일들은 비슷비슷했다. 정말 눈물이 날 지경의 행복이었다.
여성 일꾼들은 새끼에서 조금 더 자란 어린이 샌달우드들의 가지치기를 해주거나, 화분에 새끼 샌달우드를 심거나, 물을 뿌려주거나 등등의 일을 했었는데, 말 그대로 샌달우드들을 가꾸고 보살피는 역할들이었다. 뭐랄까, 유치원생들을 돌보는 유치원 선생님들이 열 너댓명 있는 느낌 같은...그런 느낌?
나는 주로 Brice랑 농담을 하면서 일을 했는데, 영국인 친구는 항상 에너지 넘쳐서 일하는데 몰두하고 농장 할아버지랑 주로 대화를 했었고, 호주인 친구는 조용조용히 말하면서 이야기하는 타입이고 말수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둘 모두 여자친구가 같이 이 곳에서 일하고 있어서 일하면서 쉬는 시간에도 주로 커플끼리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Brice랑 같이 이야기를 많이 했던 이유는 얘도 나처럼 느긋하고 여유롭게 이야기하면서 일하는걸 추구하는 타입(?) 이었기 때문이다. 성격이 비슷해서 농장 할아버지 성대모사하면서 놀리기도 하고 솔직히 맨날 일하러갔다기보단 Brice랑 노가리 깔려고 출근했던 것 같다. 하여튼 얘도 진짜 웃긴 애였다.
그렇게 나는 이 곳에서 호주를 떠나기 전까지 일을 하게 된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는건 알겠는데, 그 사람들이 나와 잘 맞고 어울리는건 또 별개의 문제다. 앞 전에 일했던 곳들에서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다 그만뒀고 쉬지 않고 전략 짜면서 여기저기 두들기다보니 결국 카나나라 kununurra 의 상상 속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패배감을 빨리 떨쳐내고 쉬지 않고 머리를 팽팽 굴렸던게 유효했던게 아닐까.
당시 시급이 23불 가까이 됐었고 환율이 1 호주달러에 1,20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한국돈으로 시급이 27,000~28,000원 정도였고 하루에 8시간 일했으니 일급이 대충 22만원 정도! 이 곳에서 나는 일주일에 대충 90만원 정도, 한 달에 360만원씩(세전) 받으며 일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하면서 재밌었던 시간이다.
그러나 돈은 사실 둘째였고, 일하는 문화와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았고 나와 잘 맞는 곳을 찾아내서 나는 성공했다고 느꼈다. 항상 도전한다고 다 성공하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퍼질러 앉아있는다고 저절로 원하는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건 알고있다. 머리로는 알고있는데 이게 또 사실 실천한다는게 쉽지 않은 일인 것도 안다.
내가 상상하며 바랐던 곳에서 일하기까지 지금까지 일종의 농장 취업 일대기를 꾸준히 써왔는데, 그 사이에 나도 농장만 찾아보며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글로는 농장 관련된 이야기만 했지만, 사실 잡다한 일들도 많이 했었다. 말 그대로 바락바락 발버둥쳤던 것이다. 안그러면 통장이 말라 죽었을 것이었으니까. 계속 도전을 하려면 어느 정도 선에서 합의점도 찾아낼 줄 알아야하는 것 같다. 대나무는 결국 부러지니까.
다음 이야기는 내가 어떻게 사막의 마을 카나나라 kununurra에서 말라죽지 않았을까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게 일을 자주 그만두었는데도 왜 계속 버티고 있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여러가지 흥미롭고, 교훈을 얻었던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데이타임에 널서리 팜에서 일하기 위해서 투쟁했던 이야기가 이렇게 있었던 것처럼, 나이트 타임에 일을 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스토리도 있다(두근두근).
그래서 내가 사용했던 생존전략은...
-To be continued-
-블로그 소개(공지) & SNS-
-이런 곳들을 다녀왔습니다-
Wandering the Earth - Google 내 지도
Places my body&soul have b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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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son 2 홀리데이 워(Holiday war) 프롤로그-
그 해 여름이었다. - 호주 워킹홀리데이 Australia, Season 2 prologue
인도를 다녀왔다. 2011년 여름이었다. 나는 태양에 새까매진 채로 학교로 다시 복학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끔씩 턱이 빠져있었는데, 다행히 시간이 흐를수록 그 주기가 길어졌다. 통증도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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