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따라 내린 나는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작게 나있는 길들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는데 한 쪽에서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국립공원 내부에는 레인저 Ranger 라고 불리는 직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총기를 지녀 무장한 상태로 사람들의 안내를 돕는다. 곰들이 습격할 수 있으니까. 시끄러웠던 이유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곰이 걸어올라오고 있어서 경계하고 있던 레인저가 방문센터로 들어가라고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쪽 길에서 곰 한 마리가 주저도 없이 길을 따라 성큼성큼 걸어올라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두 대피한 뒤 잠시 기다리니 레인저가 다시 나와도 된다는 안내를 해줬다. 레인저 없었으면 누구 한 명 끌려갔을 뻔...
아일슨 센터 Eielson visitor center 바로 옆에는 능선을 올라갈 수 있는 알핀 트레일 Alpine trail 이라는 루트가 있다. 나도 이 곳을 걸어 올라갔는데, 정상에서 펼쳐지는 알래스카 대륙은 채도가 낮은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드넓은 땅에 깊게 뿌리내린 이끼들의 흠뻑 젖은 물냄새가 바람을 타고 선선하게 불어왔다. 이 날은 유독 하늘이 낮았다. 손만 뻗으면 구름을 손아귀에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리깔린 그림자로 주름이 진 초록색 커튼 사이사이 어둠이 스며든 것처럼, 산맥은 그렇게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땅을 멀리 내려다보길 얼마간,
정상에는 여행객들이 몇 명 없었는데 어떤 여행객과 말을 트게 됐다.
"너 이렇게 나이가 어린데 세계 여행을 하고 다닌다고?"
내 이야기에 그 친구가 굉장히 좋아하며 내 사진을 마구 찍어줬다. 저 사진도 그 친구가 나중에 내게 보내준 것. 페이스북 친구하고 들어가보니 이 친구 아주 인싸 중에 인싸였다.
데날리 국립공원 여행은 인프라가 아주 잘 형성되어있다. 나처럼 그냥 막무가내로 찾아가도 이렇게 잘 돌아다닐 수 있었다. 여행을 하러갈 때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뚜벅이 여행자라면 계절만 조심해야 된다는 점 말고는 특이사항은 없지 싶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내려가는 길이었다. 나는 내 앞에 펼쳐있는 알래스카를 눈과 렌즈에 담던 중이었다.
카리부 Caribou 가 나타난건 그 때였다
카리부는 느긋하게 이끼를 향해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머리를 들어 날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완만하게 비탈진 둔덕에서 다른 이들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카리부는 그 자신의 세계에 집중하고 있는 듯 했다.
태양빛은 비스듬히 카리부를 등져 내리쬐고 있었다. 카리부와 초록 빛 땅, 그 외의 것들은 오롯이 백색白色 뿐이었다. 오로지 당신의 공간에서 태양의 주인으로서,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공교로운 시간과 각도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카리부의 거칠은 털 끝 하나하나가 마치 글자가 읽히듯 머리 속에 들어왔다. 손가락 같이 펼쳐진 뿔에 걸려 휘적거리는 풀먼지들도, 문장을 수식해주는 형용사처럼 나부꼈다. 고독하고도 아름다운 그 미세한 떨림에 내 온 마음이 빼앗겼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이 곳에 온 이유가 여기였구나.
그 영험한 순간을 잊지 못 한다. 나는 카리부에게 고개를 들어 내 영혼의 계곡이 당신 덕분에 메아리 치고 있다는걸 알려주고 싶었지만, 두 번 다시 카리부가 날 쳐다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나보다 10배는 커보이는 듯한 그 입으로 되새김질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크게 바라는 것 없었던 내 마음에 불 같은 욕망이 타올랐다.
'제발 이 순간이 조금만, 조금만 더 이어졌으면.'
카리부는 콧김을 훽하고 내뿜더니,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잠깐 응시하곤 언덕 뒤 편으로 걸어나갔다. 그 시간은 내겐 데날리의 몽타쥬이자, 알래스카 대륙이 숨겨놓은 미장센이었다. 끝나길 바라지 않았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는 허무한 마음은 오갈 곳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예상치 못 한 순간이었고. 이런 순간은 항상 그렇게 찾아왔다. 바다에 들어가 있던 내 바로 앞에서 고래가 뛰어 오르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케언즈 3대 지옥(...액티비티)과 혹등고래 - 호주 워킹홀리데이 여행 Australia working holiday, Season 2
다사다난했던 카나나라의 생활을 뒤로 한 채 나는 다윈 Darwin 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처음 카나나라로 올 때 구경했었던 황무지의 개미집들이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졌다. 내 다음 행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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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명체에게서 영험함을 느낀 것은 지금까지 딱 두 번이라 했다. 첫 번째가 바로 혹등고래였고, 두 번째가 지금 이 때의 경험, 카리부다. 혹등고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외의 존재로 느껴졌다면, 카리부는 이 영토의 수호신이었다. 빛의 색감과 습도와 온도, 이끼의 상태 그리고 각도와 시간 그 모든 것들이 혹등고래의 때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한 하나의 연출장치처럼 느껴졌다.
카리부가 보이던 내 시야의 사각 프레임 외의 그 어느 것도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자율적으로 내 시선을 그 곳에 둠과 동시에 강제적으로 시야에 대한 통제권을 강탈당한 것 같았다. 참으로 오묘했다. '신비로움'이란 단어는 언제나 내게 이 때를 연상시킨다.
카리부는 한국 말로는 순록이라고 한다. 유라시아 쪽에서는 Reindeer 라고 표현하고, 북아메리카에서는 Caribou라고 표현한다. 카리부의 언어 기원은 칼리푸 Qalipu 라는 단어에서 유래됐는데 이는 '하얀 눈을 파는 동물'을 뜻한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봤었던 카리부도 계속 이끼를 먹고 있었는데, 겨울엔 눈으로 덮혀 보이지 않는 이끼를 파내기 위해서 그런 이름을 가졌을 것이라 짐작한다.
순한 성격 때문인지 관련된 캐릭터들도 많이 있는 편.
겨울왕국의 스벤이나 원피스의 쵸파도 이 순록이 모티브인 캐릭터들이고, 산타클로스가 끄는 썰매도 이 순록들이 끄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코가 빨간 루돌프가 바로 이 카리부였던 것.
그 이후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카리부를 본 그 잠깐의 시간이 뒤의 기억들을 다 날려버렸으니까.
다른 생명체들과의 교감에서(혼자만의 교감일지라도) 지구와 자연에 종속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 땅이 온전히 나의 것만은 아님을 깨닫는다. 그들의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며 내 시야가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었던건지 생각한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 그들에게서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을 또 되뇌인다.
동물을 포함해 자연을 마주할 때 일찍이 전에 겪어본 적 없던 격렬히 타오르는 감정을 느끼거나 늪처럼 끈적한 내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사회의 껍데기를 벗어던진 나의 나약함과 보잘 것 없음이 오감에 벼락 같이 달려들기 때문이다. 자만과 오만, 편견에 사로잡혔던 때가 스쳐지나가며 온 몸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흡사 채찍을 휘두르며 내 등에 남긴 상처로써 속죄하는 고행자가 된 것 같다.
하찮음. 나 또한 한낱 미물일 뿐구나.
오늘 날 뒤돌아보면 구부러져 휘어진 것 같은 삶으로 보일지언정, 최선을 다해 바로 걸어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보다 나은 선택을 위해 고민 했었을 때마다 먼 과거의 시간들에서 '힌트'를 얻어 판단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매 때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고단한 여행이 없었다면 '힌트들'도 적었을거니까.
나는 멍한 정신을 부여잡고 라일리 크릭 캠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페어뱅크스로 향할 차례였다.
-To be continued
아프리카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사진자료가 들어있던 메모리카드를 도난당했습니다. 호주 및 북미,남미 대륙의 여러 경험을 사진과 함께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해 많이 아쉽습니다. 남아공의 너 밥은 잘 먹고 다니냐?
-블로그 소개(공지) & SNS-
-이런 곳들을 다녀왔습니다-
The wandering Earth - Google 내 지도
Where is Atlan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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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ason 3 북미(North America)의 시작부터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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